| | 아래 글은 2001년 2월 23일 `여수의제 21` 총회에서 있었던 염형철 간사 강연의 원고입니다.
지속가능발전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은 원래 나무로 가득 차 있었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폴리네시아인이 이 섬에 이주하여 숲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6세기경이었다. 주민들은 바나나, 고구마, 사탕수수를 심었고, 땅이 매우 비옥했기 때문에 소출은 많았다. 인구는 점차 불어났고, 식량을 위해 더 넓은 숲이 개간되었다. 12세기경, 인구수는 1만여 명에 이르고, 이스터섬은 최고의 번영기를 맞았다. 하지만 수백년 동안 진행된 번영기는 17세기 후반 급격한 인구 감소와 함께 붕괴하고 말았다. 농지, 건축, 땔감 등의 필요 때문에 15세기 초엽에는 숲이 황폐화되었으며, 섬에는 홍수와 가뭄이 빈발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마지막 남은 숲을 차지하기 위해 부족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영양실조, 전염병, 부족간의 싸움 속에서 이스턴 문명은 종말을 맞았다. 19세기 중엽 유럽의 탐험가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스터섬에는 인간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퇴화한 소수의 원시인들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섬 서쪽에는 그들이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운 거대한 돌장승들이 과거 문명의 시대가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위 이야기와 관련하여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자. 더 풍족한 삶을 위해 부지런히 밭을 일구었던 폴리네시아인들, 신을 칭송하기 위해 거대한 돌을 조각하고 재단을 만들어 축재를 즐겼던 그들의 죄는 무엇인가? 대답은 어렵지 않다. 자신들이 쓰러뜨렸던 나무와 뽑아 팽개쳤던 풀꽃들의 원한을 잊고 있었다. 숲을 훼손하여 섬 생태계를 망쳐놓은 결과가 자신들의 문명을 지속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진리는 인류의 역사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라고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나일강이 흐르는 이집트,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과 황하 중상류지역들도 또한 모래 사막 속에 파묻혀 있다. 문명의 개척자들이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사막 가운데 역사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황막한 사막은 비옥한 토지와 울창한 산림이 파괴되고 그곳에 깃들어 살았던 사람들의 파멸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그리스 말기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크리티아스』에서 조국의 산하가 "병으로 상처가 심해져 이제는 뼈만 남은 것 같다"고 한탄했다. 함선을 건조하기 위해 쓰러뜨린 삼나무, 전나무와 함께 그리스의 운명이 기울고 있음을 철학자는 예감했던 것이다.
위의 예들과 같이 생태계의 붕괴에 따른 문명의 파탄은 대부분 자연자원에 대한 무분별한 낭비와 관계가 있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불러올 결과를 몰랐던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의 사람들은 환경위기의 원인과 대책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미래를 예측할 지력을 가진 현대인들의 생활은 과거의 문명들이 자연에 대해 행했던 바와 별로 다르지 않다. 과거의 문명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황무지로 만들고 스스로를 멸망으로 몰아갔던 시행착오를 똑같이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도리어 현대문명은 국토를 덮고 있는 숲을 파헤치는 것에 멈추지 않고, 5대양 6대주의 구석구석까지를 원료생산과 소비의 시장으로 바꾸고 있다. 인류는 20세기의 100년 동안, 수 백 만년을 통해 형성된 화석연료와 자원들의 절반을 소비했으며, 엄청난 양의 폐기물과 독극물들을 배출했다. 이러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속도로 (하나의 문명이 아닌) 지구 전체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들로는 화석연료의 과다 사용이 불러온 지구온난화, 화학물질의 남용이 야기한 오존층파괴, 생명활동의 퇴화와 왜곡을 일으키고 있는 환경호르몬의 확산, 죽음의 그림자라 불리는 핵물질의 이용 증가, 순식간에 문명을 파괴하는 현대전쟁 등이 꼽힌다. 이것들은 국경을 넘고 시공을 초월하여, 이스턴 섬의 비극을 지구차원으로 날라 오고 있다.
위기에 이르러서야, 지구 생태계를 유지하고,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과 생존을 꾀하려는 고민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들이 섭취할 수 있는 영양,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개발할 수 있는 토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따져보는 시도들이 생겨나고 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 몇 평의 땅과 몇 마리의 동물이 희생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연구들도 일어나고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바로 이러한 질문과 고민의 결과이다. 1960년대에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고, 1970년대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여, 1992년에 세계 178개국 정상들이 합의하는 지구적 차원의 이념으로 승화하게 된 것이다. "미래세대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능력의 손실 없이, 현세대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개발", 즉 현세대가 미래세대의 권리를 인정하고 공존하자는 선언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후세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우리들이 몫을 어느 정도의 개발과 소비라고 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구의 환경용량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주장은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의 주장에 세계 시민들이 합의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다. 더구나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권리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이르면, 이러한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자신들의 몫에 대한 주장이 나라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편의 국가나 계층이 한정된 자원을 과잉으로 이용하게 되면, 반대편에서의 저항은 거세질 것이고 결국 현재의 몫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조차 붕괴되어, 자원의 낭비는 더욱 가속화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세계는 한편으로 각 나라의 책임을 나누고 공동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해야하기 위한 협상을,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용량의 선정과 자신들의 몫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책임의 공정한 분담을 위해, 여성, 청소년, 지역사회 등 사회적 약자들의 몫과 역할에 대해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 다양한 사회주체들의 참여와 합의에 의한 자발적 역할분담이 지속가능발전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라는 합의에까지 이르렀다. 여전히 세계가 건전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논쟁을 겪게 될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대통령 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이러한 세계적 조류에 기인하여 지난해 9월 출발하였다. `지속가능발전` 이념을 대한민국에서 실현하기 위해, 지구 차원의 협력을 수행하고 국가차원의 지속 가능한 발전 전략을 수립하고자 창립된 것이다. 따라서 위원회의 임무는 우리 사회의 운영원리와 비전을 지속가능성이라는 잣대에서 조정하고, 지구촌의 구성원으로서 세계적 합의를 도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현실 속에서 `우리 사회가 인내해야할 새로운 규율의 도입`을 주장하고, 사회의 동의를 구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또 제도와 정책의 정비나 조정은 물론, 새만금 간척사업이나 경인운하의 건설과 같은 대규모 사업들, 여러 부처에 난마처럼 얽혀 있는 수자원 관련 업무 등을 지속가능성의 관점으로 평가하기 위해 복잡하고 대립적인 이해 관계들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창립 후 5개월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사회가 지속가능발전 개념을 수용하고, 이러한 기준을 효율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 아직은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지속가능발전위원회의 성패는 우리사회가 현재와 미래, 자연과 인간, 지역과 지역이 공존과 협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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